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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실업야구/역대 참가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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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전에도 교통부 야구단이 있었으나[9] 공식적인 실업 야구팀으로는 1959년 2월에 창단되었다.## 1963년 12월에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김성근 감독이 한국에서 야구생활을 이 팀에서 시작했다. 1959년 창단 멤버로 활동.위의 사진에서 한번 잘 찾아 보자.
1962년 3월 창단되었다. 이후 1977년 해체되었다. 남은 기업은행 선수들은 1977년 12월에 창단된 신생팀 포항제철로 옮겼다.
김성근이 교통부 야구단에서 1년 간 뛴 후 1963년, 기업은행 야구단에 입단해 선수로 활약했으며 1968년에 선수 은퇴 후[11] 1970년부터 1975년까지 투수코치(1970년) 및 감독(1971년~1975년)으로 재직한 팀이기도 하다.
원래 명칭은 육군 야구단으로 1953년 군 야구단 중 최초로 창단되었다. 1978년 경리단으로 이름을 바꿨고 1984년에는 공군의 성무를 합병해 상무로 이름을 바꾸고 규모를 늘렸다. 2001년부터는 프로 2군리그에 참가하고 있다. 때문에 2000년까지만 실업야구에 참여한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2001년과 2002년은 프로와 실업에 2중 등록했다. 2002년 대통령배 자세한 건 항목 참조.
여담으로 군 야구단 3팀인 해군 야구단, 해병대 야구단, 성무 야구단을 결과적으로 모두 흡수한 팀이다.[14]
우리은행의 전신인 한국상업은행이 보유했던 실업야구단. 1962년 창단되었고, 1993년 해체되었다. 이미 1987년을 끝으로 선수 선발을 중단하면서 해체 기미를 보인 상태였다.
참고로 숙소를 상업은행 축구단과 함께 썻으며 그 위치는 현재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해 있었다.
1963년 창단되었다. 1964년 시즌 종료후에 다른 팀들과 마찬가지로 해체되었다.
1962년 창단되었다. 1964년에 다른 팀들과 마찬가지로 해체되었다.
1946년 실업야구연맹 창립 멤버이자 실업야구 원년 구단.
조선전업(朝鮮電業)이 운영했던 실업야구단. 조선전업은 1961년에 한국전력의 발전부분으로 통합되면서 이때 야구단은 해체되었다.
실업리그의 마지막 팀으로 유명하다. 연고지는 인천광역시. 1993년 사회인야구단으로 창단되었고, 1997년 실업야구로 전환하였다. 2003년 2월, 한국실업야구의 유일한 팀이어서 존재 여부가 없어져 해체되었다.##, 당시 기사
여타 실업야구팀 처럼 해당팀 선수들은 실업야구 리그가 있는 날만 야구장으로 가고, 경기가 없는 날엔 공장에서 일을 했다.관련 기사 인천에 연고를 둔 회사로 야구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인천 연고지 프로야구 방출 선수들을 고용하면서 실업팀에 출전시킬 정도로 열의가 많은 팀이었다.
1963년 창단되었다. 1978년에 한일은행과의 합병으로 현대건설팀으로 통합발족을 시도했다.##. 하지만 제일은행 야구단 소속 선수들이 현대건설 입사발령 단계에서 반발이 일어났고 대학졸업자 스카우트도 힘들어 1년간 보류를 한다고 알렸다.##. 그리고 현대건설의 창단 계획은 백지화 되었다.
한일은행 야구단 항목도 참조하길 바란다.
1995년 해체되었는데, 해체를 꽤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는지 1990년부터 선수를 일체 받지 않았다.
1964년에 창단했다. 창단 당시 전년도에 해체를 선언한 미창 야구단 선수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이후 재정난을 이유로 1965년 한일은행에 선수단이 인수되었다.
이 팀에서 활동했던 김응룡의 말에 따르면 크라운맥주 선수들은 매일 저녁 시내 술집들을 순회하며 영업 활동을 했는데, 사람 많은 술집에 들어가서 타 회사 맥주를 주문하여 마시고는 "야, 이 회사 맥주는 마시면 배아프고 설사가 나서 안되겠다. 역시 맥주는 크라운이 최고다" 라고 얘기하는 일종의 바이럴 마케팅 이었다...그 당시 크라운 외의 맥주회사 라고 해 봤자... 그래서 김응룡은 하루가 멀다하며 맥주를 마시다 보니 체중이 늘어 고생했다고.
대한해운공사에서 운영했던 야구팀. 1962년 3월 22일 창단되었다. 1964년에 다른 팀들과 마찬가지로 해체되었다.##
창단 당시 1995년 현대그룹이 제2리그를 꿈꾸며 만들었으나, 같은 시기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 현대 건설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9년 해체되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1986년 2월에 창단되어 위축되어가던 실업야구의 부흥을 위해 1999년부터 참여했다. 1999년 초 실업야구에 참가[16] 하면서 실업야구팀인 1부팀과, 사회인 야구팀인 2부팀으로 나뉘었다. 대한야구협회장을 맡고 있던 정몽윤 회장이 야구에 열성을 보여[17] 1999년 부터 실업야구에 참여했으나 선수수급에 어려움을 겪어 결국 2002년을 마지막으로 1부팀인 실업야구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7년 한국야구위원회총재배 8개구단 그룹사 야구대회의 초대 챔피언이자 마지막 챔피언이기도 하다.
2002년초 실업팀은 해체했지만 사회인야구단은 현재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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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통부 야구단[편집]
해방 이전에도 교통부 야구단이 있었으나[9] 공식적인 실업 야구팀으로는 1959년 2월에 창단되었다.## 1963년 12월에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김성근 감독이 한국에서 야구생활을 이 팀에서 시작했다. 1959년 창단 멤버로 활동.
1.1. 유니폼[편집]
2. 기업은행 야구단[편집]
1962년 3월 창단되었다. 이후 1977년 해체되었다. 남은 기업은행 선수들은 1977년 12월에 창단된 신생팀 포항제철로 옮겼다.
김성근이 교통부 야구단에서 1년 간 뛴 후 1963년, 기업은행 야구단에 입단해 선수로 활약했으며 1968년에 선수 은퇴 후[11] 1970년부터 1975년까지 투수코치(1970년) 및 감독(1971년~1975년)으로 재직한 팀이기도 하다.
2.1. 유니폼[편집]
3. 농협 야구단[편집]
4. 롯데 자이언트[편집]
5. 삼국석탄 야구단[편집]
6. 상무 피닉스 야구단[편집]
원래 명칭은 육군 야구단으로 1953년 군 야구단 중 최초로 창단되었다. 1978년 경리단으로 이름을 바꿨고 1984년에는 공군의 성무를 합병해 상무로 이름을 바꾸고 규모를 늘렸다. 2001년부터는 프로 2군리그에 참가하고 있다. 때문에 2000년까지만 실업야구에 참여한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2001년과 2002년은 프로와 실업에 2중 등록했다. 2002년 대통령배 자세한 건 항목 참조.
여담으로 군 야구단 3팀인 해군 야구단, 해병대 야구단, 성무 야구단을 결과적으로 모두 흡수한 팀이다.[14]
7. 상업은행 야구단[편집]
우리은행의 전신인 한국상업은행이 보유했던 실업야구단. 1962년 창단되었고, 1993년 해체되었다. 이미 1987년을 끝으로 선수 선발을 중단하면서 해체 기미를 보인 상태였다.
참고로 숙소를 상업은행 축구단과 함께 썻으며 그 위치는 현재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해 있었다.
7.1. 유니폼[편집]
8. 서울시청 야구단[편집]
1963년 창단되었다. 1964년 시즌 종료후에 다른 팀들과 마찬가지로 해체되었다.
8.1. 유니폼[편집]
9. 세일통상 야구단[편집]
10. 식산은행 야구단[편집]
11. 인천시청 야구단[편집]
1962년 창단되었다. 1964년에 다른 팀들과 마찬가지로 해체되었다.
11.1. 유니폼[편집]
12. 전업 야구단[편집]
1946년 실업야구연맹 창립 멤버이자 실업야구 원년 구단.
조선전업(朝鮮電業)이 운영했던 실업야구단. 조선전업은 1961년에 한국전력의 발전부분으로 통합되면서 이때 야구단은 해체되었다.
13. 제일유리 야구단[편집]
실업리그의 마지막 팀으로 유명하다. 연고지는 인천광역시. 1993년 사회인야구단으로 창단되었고, 1997년 실업야구로 전환하였다. 2003년 2월, 한국실업야구의 유일한 팀이어서 존재 여부가 없어져 해체되었다.##, 당시 기사
여타 실업야구팀 처럼 해당팀 선수들은 실업야구 리그가 있는 날만 야구장으로 가고, 경기가 없는 날엔 공장에서 일을 했다.관련 기사 인천에 연고를 둔 회사로 야구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인천 연고지 프로야구 방출 선수들을 고용하면서 실업팀에 출전시킬 정도로 열의가 많은 팀이었다.
14. 제일은행 야구단[편집]
1963년 창단되었다. 1978년에 한일은행과의 합병으로 현대건설팀으로 통합발족을 시도했다.##. 하지만 제일은행 야구단 소속 선수들이 현대건설 입사발령 단계에서 반발이 일어났고 대학졸업자 스카우트도 힘들어 1년간 보류를 한다고 알렸다.##. 그리고 현대건설의 창단 계획은 백지화 되었다.
한일은행 야구단 항목도 참조하길 바란다.
1995년 해체되었는데, 해체를 꽤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는지 1990년부터 선수를 일체 받지 않았다.
14.1. 유니폼[편집]
15. 조선미곡창고 야구단[편집]
16. 조흥은행 야구단[편집]
17. 중앙실업 야구단[편집]
18. 철도청 야구단[편집]
19. 체신 야구단[편집]
20. 크라운맥주 야구단[편집]
1964년에 창단했다. 창단 당시 전년도에 해체를 선언한 미창 야구단 선수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이후 재정난을 이유로 1965년 한일은행에 선수단이 인수되었다.
이 팀에서 활동했던 김응룡의 말에 따르면 크라운맥주 선수들은 매일 저녁 시내 술집들을 순회하며 영업 활동을 했는데, 사람 많은 술집에 들어가서 타 회사 맥주를 주문하여 마시고는 "야, 이 회사 맥주는 마시면 배아프고 설사가 나서 안되겠다. 역시 맥주는 크라운이 최고다" 라고 얘기하는 일종의 바이럴 마케팅 이었다...
20.1. 유니폼[편집]
21. 포스틸 야구단[편집]
22. 한국화장품 야구단[편집]
23. 한일은행 야구단[편집]
24. 한국전력공사 야구단[편집]
25. 해운공사 야구단[편집]
대한해운공사에서 운영했던 야구팀. 1962년 3월 22일 창단되었다. 1964년에 다른 팀들과 마찬가지로 해체되었다.##
25.1. 유니폼[편집]
26. 현대 피닉스[편집]
창단 당시 1995년 현대그룹이 제2리그를 꿈꾸며 만들었으나, 같은 시기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 현대 건설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9년 해체되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27. 현대해상화재보험 야구단[편집]
1986년 2월에 창단되어 위축되어가던 실업야구의 부흥을 위해 1999년부터 참여했다. 1999년 초 실업야구에 참가[16] 하면서 실업야구팀인 1부팀과, 사회인 야구팀인 2부팀으로 나뉘었다. 대한야구협회장을 맡고 있던 정몽윤 회장이 야구에 열성을 보여[17] 1999년 부터 실업야구에 참여했으나 선수수급에 어려움을 겪어 결국 2002년을 마지막으로 1부팀인 실업야구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7년 한국야구위원회총재배 8개구단 그룹사 야구대회의 초대 챔피언이자 마지막 챔피언이기도 하다.
2002년초 실업팀은 해체했지만 사회인야구단은 현재도 남아있다.
[1] 실업야구팀으로 전환은 1946년[2] 전신인 남선전기 야구단 창단 연도[3] 2001년부터 퓨처스리그에 참가.[4] 크라운 맥주 야구단 해체후 인수재창단[5] 한일 은행 야구단에 인수[6] 이후 프로로 전환해 롯데 자이언츠로 유지중[7] 이후 사내 야구단으로 전환[8] 이영민이 1929년에 입단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1920년~1928년 사이에 창단 된 것으로 보인다.[9] 예를 들어 1953년 남선전기 야구단과 맞붙어 이겼다는 기사가 있다.#[10] 홈에 들어오고 있는 이가 교통부 야구단 정두영.[11] 1969년에는 마산상고 야구부의 감독으로 재임했었다.[12] 군산상고의 초대감독이자 전성기를 이끈 명감독.[13] 1999년 한국야구위원회에서 퍼낸 <한국야구사> 에 따르면 1946년에 창단한 한성실업야구 초대 8개팀중 한팀으로 언급되어 있기때문에 1946년에 창설된 것으로 보이며, 1947년에 참가했다는 당시 기사 이후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1947년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14] 해병대가 해군을 흡수, 공군이 해병대를 흡수, 상무가 성무(공군)를 흡수.[15] 날라차기 하는 박남호의 유니폼이 제일은행 유니폼이다.[16] 현대피닉스는 1999년 말에 해체되었기 때문에 두 팀이 경기를 치룬적도 있다.[17] 2004년까지 현대해상 야구팀에서 1루수로 직접 경기를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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